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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다재다능한 예술가 지운영

by 냠냠똥과자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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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예술사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그 흐름을 빛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운영입니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존재는 한국 예술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다재다능한 재능과 독창적인 삶의 방식은 그를 신비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그의 작품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비로운 예술가 지운영의 삶과 업적

지운영은 실제로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예술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의 다양한 재능과 깊은 학문 지식, 그리고 독특한 삶의 방식은 그를 신비로운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의 글씨와 그림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잘 보여주는데, 해서와 행서에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며 그림에서는 정교한 선묘와 생동감 있는 색채를 사용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소재를 표현했습니다. 또한, 지운영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삶에서는 무술 연마나 산속에서의 수행 등 도교적인 요소가 돋보입니다. 그의 주술적인 전서나 전해 오는 이야기는 그의 신비로운 면을 강조하며, 특히 그가 즐겨 그린 '일심보검'은 그의 도가적인 신념과 검술에 대한 열정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지운영은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 사진술과 도교, 무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광교 부근에서 살다가 강위와의 만남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강위의 영향을 받아 현실 참여 의식을 키우고,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우며 새로운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1883년에는 통리군국사무문의 주사로 임명되어 귀국한 뒤 사진관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종의 어진을 찍는 등 중요한 사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화파들의 갑신정변으로 사진관이 파괴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후 고종의 밀명을 받아 망명한 개화파들을 처단할 자객으로 선발되는 등의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이후 지운영은 유배 생활을 겪고 돌아온 뒤 은둔 생활을 시작하며 서화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예술의 비주류적 삶을 담은 작품 : 지운영의 <동파입극도>

지운영은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기 위해 〈동파입극도〉를 많이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되었을 때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소식을 받은 소동파의 모습을 그려 세상의 일에서 밀려나고 주유천하하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서화가 황철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지내면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1892년에는 여행 경비가 마련되어 청나라로 여행을 떠나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서화를 배웠습니다. 그는 한국과는 다른 북종화풍의 산수화를 익히고, 달마 등 고사를 소재로 한 인물화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는 청에서 전문적으로 도교를 익혔으며, 도교의 가르침을 받아 양평 용문산에 도관을 세우고 상을 봉안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발전시키고 세상의 다양한 면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화가로서 활동하며 <동파입극도>와 같은 작품을 자주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처지와 삶의 여러 어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오세창과의 인연을 통해 서화계와 가까이 지내며 활동하였으나, 불공평한 대우 등으로 인해 비주류적인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지운영과 황철의 이야기

지운영은 김용진, 황철과 같은 후배 서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평안도 지역의 화가인 반돈식, 송기근, 여성화가인 김석범 등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운영의 아들인 지성채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거의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지운영의 특유한 습윤한 산수화를 배워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지운영은 특히 황철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았고 배포가 잘 맞아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인연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황철은 지운영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지운영이 그의 본명인 '준성'을 '철'로 바꾸고 자를 '야조'라 지었다고 합니다. 황철이 일본에 망명할 때에도 지운영이 자주 찾아가 함께 지냈습니다. 그들이 일본에 있을 때는 주로 일본인 스나가 하지메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스나가 하지메는 당시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개화된 인물로,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옥균, 박영효, 황철 등 많은 한국인이 스나가 하지메의 도움을 받았으며,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주로 박영효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스나가 하지메는 많은 한국의 명사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한국 문화와 인물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황철과 스나가 하지메의 우정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황철이 스나가 하지메의 집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으며,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몸을 스나가 하지메의 집안의 선영에 안치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는 둘 사이의 깊은 우정과 신뢰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스나가 하지메는 황철이 망명한 후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여 그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철은 대작 산수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안타까운 마음을 느낀 스나가 하지메는 황철의 미완성 작품을 지운영에게 부탁하여 완성해 달라고 합니다. 지운영은 이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여 황철이 죽은 지 두 돌이 지난 날에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는 황철과의 우정과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이 작품을 통해 두 사람 간의 깊은 유대를 보여줍니다. 화제 속에는 두 사람의 감정과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이는 그림뿐만 아니라 지운영의 시문에도 잘 표현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한국 미술사에서 '지운영'을 큰 비중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완성도 면에서 다른 전문 화가들 못지않다는 점과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점은 분명히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지운영은 단순히 서화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시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사진술과 도교, 무술 등 다른 활동에도 능했습니다. 그의 다방면의 활약은 그가 단순히 화가로서의 한정된 역할을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또한, 그의 작품이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가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후배들에게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의 기술과 예술적 경험은 큰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운영은 단순한 화가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양한 활약과 후대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새롭게 관심을 가져볼 만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품과 활동을 다각도로 살펴보면 한국 미술사에 있어서 그의 역할과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