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은 그 다양성과 풍부한 역사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의 서촌 지역은 한국 미술사에서 두드러진 장소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곳에서 활약한 미술가들은 한국 예술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촌에서 미술 활동을 펼친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는 한국 미술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작품과 업적은 우리에게 한국 예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여주는 보물로서 간직되어 왔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국 미술의 발전과 변화를 엿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간 시대와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한국 미술사에 미친 영향과 그들이 남긴 역사적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함께 이 두 미술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월북한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
서울 서촌에서 미술 활동을 펼치던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는 두드러진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이들 형제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경성(서울)으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 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보여, 서울의 중학동으로 이사하며 그들의 미술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다닌 학교는 미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며, 유명 화가들이 교사로 있었습니다. 이여성과 이쾌대는 형제로서 서촌에서의 생활을 함께했습니다. 이여성의 집은 옥인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쾌대의 집은 궁정동으로 현재의 청와대 왼쪽에 위치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는 이쾌대가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집을 마련해 주었고, 부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여성은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로서 사회운동가, 언론인, 화가, 학자,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신여성 박경희와 결혼하였으며, 사회주의 활동과 연구를 지속하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이명건이지만, '여성'이라는 이름자를 좋아하여 평생 사용하였습니다. 이쾌대는 휘문고등학교에서 서양화가 장발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궁정동에서 생활하며 '성북미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하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혔으며, 휴전 협정 이후에는 남북 포로교환 중 북한을 선택하고 넘어갔습니다.
이여성의 이야기
이여성은 동아일보에 근무하며 미술가 이상범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4년 서화협회전에 참가하여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5년에는 이상법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2인 전을 열었습니다. 이들의 전시는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여성은 주로 산수화를 그렸으며, 때로는 정치적인 필치의 역사화나 풍속화도 그렸습니다. 이여성의 그림 스타일은 일본적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대표작인 <격구도>에는 일본의 역사화 전통과 기법이 드러납니다. 또한 수묵산수화에서도 일본의 신남 화의 분위기가 짙게 느껴집니다. 이여성은 이상범과 또한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함께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범의 호가 '청전'이고 이여성의 호가 '청정'으로 같은 청 자를 공유함으로써 그들 간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1936년 말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어 동아일보에서 강제로 사직한 후, 이여성은 동양화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신문지상에서 자신의 그림을 발표하며 화단의 혜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여성은 평소에 민중을 위한 창작활동, 즉 프롤레타리아 예술에 대한 예술론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여성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예술론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산수화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풍경화에 그쳐있습니다. 그의 역사화에서도 그러한 일면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이 드물어 이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여성의 예술론은 그의 문화사 연구에서 더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47년에 출간된 <조선복식고>는 이여성의 복식 연구를 통해 그의 의식 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 최초의 복식사 연구로서 한국의 복식 분야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이여성은 복식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고증하기 위해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을 초대하여 옷을 입혀 사진을 찍으려 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패션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구경거리가 되었던 일입니다.
이쾌대의 이야기
이쾌대는 도쿄에서 열린 이과전에 <운명>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한 후 3년 연속으로 입선하는 등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소재로 하였으며, 예민한 조형 의식과 개성적인 표현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 여인의 다른 시기 삶을 한 화면에 배치한 작품들은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일본에서 유행한 '이시동도법'이라는 기법을 차용하여 더욱 탁월한 조형 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1941년에는 이중섭, 진환, 최재덕, 문학수 등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동인전을 개최하여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특별한 성과를 보인 단체 중 하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조선미술동맹에서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상적 경향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47년에는 "진정한 민족예술의 건설"을 표방하면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때부터는 자신의 인생 역정과 조국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대표작인 <군상> 연작도 이때 제작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이쾌대의 작품이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저평가된 화가로 여겨졌지만, 점차 재평가되고 가장 중요한 근대작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작품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 이루어진 것이 문제로 지적됩니다. 그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와 독창적인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한국 미술계는 그의 작품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서촌의 미술가 이여성과 이쾌대 형제는 한국 미술사에 빛나는 별들로서 그들의 작품과 업적은 오늘날에도 새롭게 발견되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동시에, 한국 미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한국 미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큰 도움이 되며, 그들의 업적은 끊임없는 연구와 평가가 이뤄져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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