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추상미술은 산업과 과학의 발전, 그리고 전쟁의 경험에 기인한 것으로서, 특히 6.25 전쟁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에 한국 미술계는 기반이 취약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통해 예술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고 행동하는 그룹들이 탄생하였다. 이들은 1957년에 폭발적으로 활동하며 전시를 개최하였고, 이러한 추상미술의 흐름에서 주요한 활동을 보인 인물 중 하나가 하인두였다.
작가의 정체성 탐색
하인두는 신예 현대 작가의 일원으로 1950년대 말에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 회원으로서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도 초대되었다. 이른바 '앵포르멜 미학'으로 일컬어지는 당시 추상표현주의의 일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전위미술의 새로운 기류를 타고 등장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자의로 선택했든 타율에 의해서였든 그는 어떻든 모더니스트로 출발했다. 해방 이후의 전후 세대, 이것이 하인두 세대를 규정할 수 있는 트레이드마크가 될지는 모르겠다.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하던 20대 초반에 전쟁을 겪어야 했고, 그 전쟁의 막바지에 사 회로 밀려난 세대인 것이다. 전쟁은 가치관의 변동을 낳는다. 요컨대 하인두 세대는 가치관의 극심한 변동과 갈등 가운데서 잉태된 특별한 세대임이 분명하다.
앵포르멜 미학의 탄생지에서의 하인두
안국동 네거리 부근에 또 하나의 화가들의 아지트가 생겼다. 홍대 교수로 재직했던 화가 이봉상이 개설한 안국동 화실'이었다. 여기서 만난 연구생 신분의 화학도들이 후에 앵포르멜 운동을 일으킨 주역들이었다. 1957년에 발촉 한 '현대미술가협회'(창립회원: 김영환, 이철, 문우식, 조동훈, 김종휘, 조용민, 김청건, 하인두, 장성순, 김충선, 나병재, 김서봉, 김창열)가 그 모체였으며 뒤에 박서보 등이 가세하여 더 탄력을 받는다. 이제까지 세계 문화의 변방지대로 밀려나 있으면서 국제적인 정보 채널이 전무했던 이 땅에 앵포르멜 미학의 비정형한 새 양식을 이식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만든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구열의 다음 글을 참조하기로 한다. "한국의 비극적이고 극한적인 상황의 체험은 새로운 가치의 가능성을 열망하던 일부 지적인 새 세대의 정신적 갈등에 하나의 통렬한 방향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구미 조류의 정보는 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시사 잡지의 아트 란 또는 미술의 새 동향 특집(원색화보 포함)을 비롯하여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던 미술 잡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되는 것이 그 시기의 불가피한 실태였다." 당시 화단의 일반적인 관례로서 미술계 진출이란 국전이라는 관문을 통하는 것이었다. '국전 계급장 제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하인두가 국전에 출품하여 여덟 번씩이나 낙선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그의 예술 수상록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다. 그 자신 "국전사상 최악의 작가" 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폴 세잔이 살롱에서 두 번이나 낙선의 고배를 든 예를 들면서 "실망보다 어떤 긍지 같은 것도 느낀다"며 자위하고 있다.
하인두 작품의 세계
하인두의 작품세계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실제 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작품 1자 화상 (1954)에서부터 풀어 간다. 이 유화 작품은 인물의 포즈 구성상의 문제, 기법 면에 있어서도 풀 세잔의 동명 작품과 너무 닮았다. '의도적인 유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작가 자신이 어느 정도 폴 세잔에게서 정신적인 제휴를 갈망했는지를 인증한 예라 할 것이다. 인물을 모티프로 한 다른 작품에서도 작가는 입체과적인 해체, 분할의 방법을 즐겨 썼다. 입체파적인 표현 양식에 접근해 있었다는 사실은 향후 작품 경향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 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서구적인 분석적 방법이나 구조성만을 적극적으로 맹신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동양적인 직관이나 정관에 탐닉하는 타입이었다. 1960년대 이후 한때 정신적 방황의 침체기를 맞기도 하면서, 작품은 기하학적으로 정제된 색면추상으로 정착된다. 초기의 뜨거운 추상'에서 '차가운 추상'으로의 변주, 그리고 선 사상에 귀의한 듯한 형상 이미지와 종교적 상징성이 가미되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해 왔다. 1970년대 이후 몇 차례 유럽 체류의 기회를 가지면서, 서구 미술의 현장을 직접 체험적으로 목격한 작가에게 동서 문화의 가치에 대한 진정한 성찰의 기회가 찾아왔다. 동, 서 미술의 기법과 양식, 정신과 사상성을 동시에 수용하고 모색해야 하는 이중의 작업적 부담은 우리 작가들에게 깊은 고뇌를 안겨 왔다. 하인두야말로 생애를 통해 그러한 과제를 풀어가야 하는 작업적 여정에 섰던 화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무리하며, 하인두는 현대미술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며, 앵포르멜 미학을 일으킨 전위미술의 새로운 기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독특한 시각과 정서를 전달하며, 그의 생애와 작품은 한국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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