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오지호의 이야기는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과 열정, 그리고 역경을 극복한 인생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오지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의 학문적인 도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한국적인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오지호의 인생과 작품을 통해 그의 미술적 취향과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함께 그의 미술 여정을 따라가며, 한국 미술사에 빛나는 한 획을 남긴 그의 업적을 되새겨봅시다.
그림 그리는 아이에서 화가로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 동복면에서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오지호'라는 이름은 훗날 30대부터 사용한 필명이며, 본명은 '오점수'입니다. 이 이름은 형제들이 일찍 죽을까 봐 걱정한 부친이 새롭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친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각자로 후에 보성군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선생을 두고 공부하며 자존심 강한 아이로 자랐으며, 동복보통학교에서는 뛰어난 미술 실력을 보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졸업 후 한동안은 부친 곁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 공부를 했습니다. 1910년,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이 고종의 죽음과 3·1 운동을 목격하고 자결하였습니다. 이를 목격한 오지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며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전주에서의 생활은 점차 지루해지자, 오지호는 서울의 휘문고보에 편입시험을 보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휘문고보에서는 많은 친구들과 활기찬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특히 동급생들과의 교분을 쌓았습니다. 오지호는 휘문고보에서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한국 최초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로 유학을 다녀온 고희동을 만나게 되었는데, 고희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희동의 서양화 작업을 이어가지 못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3학년 때 처음 접한 나혜석의 활동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1922년 18세 때 어머니의 주선으로 광주 부호의 딸인 지양진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휘문고보 4학년 때 나혜석, 이종우, 백남순, 이제창 등이 중심이었던 '고려미술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가까이 지내던 경성제일교보의 김주경, 중앙고보의 김용준과 함께 그림 수업을 받았는데, 특히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이제창의 지도를 자주 받았습니다. 1924년에는 학교 아틀리에에서 목탄으로 석고 데생을 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때,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목표로 하며 김주경, 김용준 등과 함께 중앙고보에 있던 이종우 화실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종우는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 미술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지호는 이곳에서 두 달간 열심히 공부하며 성장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오지호 그후 선생으로서의 삶
1925년 3월, 오지호와 김용준은 꿈을 향해 청운을 건너기 위해 도쿄미술학교 입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서양화과에 낙방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연마한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쓴 경험이었습니다. 오지호는 재수를 위해 입시 준비를 전문으로 하는 가와바타미술학교에 들어가 1년간 열심히 입시를 준비합니다. 다행히 이듬해인 1926년, 김용준과 함께 도쿄미술학교에 성공적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1928년에는 오지호가 당대 일본 최고의 화가로 유명한 후지시마 다케지의 교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지시마 다케지의 과묵한 성격과 인상파에 충실한 작품 역량에 매료되며 그에게 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1929년에는 영친왕이 도쿄미술학교를 방문하게 되는데, 후지시마 다케지는 영친왕에게 오지호의 그림을 사도록 권유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지호는 물감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는 김주경이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장석표 등과 함께 '녹향회'를 결성하여 민족미술 수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오지호는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참석하여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1932년에는 녹향회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932년에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오지호는 한동안 고향 동복에 머물다가 1933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는 종로에 새로 생긴 동화백화점 광고부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서인지 1년여 만에 그만두게 됩니다. 그때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김주경의 권유로 개성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개성으로 오면서 '오점수'라는 이름을 '오지호'로 바꾸었습니다. 본명이 화가로서 어울리지 않아서 자신이 호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지호는 개성에서 자연의 풍경을 자유롭게 그려내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송도고보 교사 시절, 방학이 시작되자 김주경과 함께 만주로 사생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생각을 넓히는 뜻깊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이 여행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의 회화이론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1938년에는 친구 김주경과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출간하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그는 '순수회화론'이라는 미술론을 발표하고 미술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1940년 일본의 태평양전쟁 예고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했는데, 대부분의 송도고보 교사들이 창씨개명을 하였지만, 오지호는 '오점수'라는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오지호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해방기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의 이념적 대립으로 화단이 분열하기 시작하자 1948년 광주로 낙향하게 됩니다. 광주 조선대학 미술과 교수로 그는 예술가적 정열로 10년 동안 호남 서양화단을 이끌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한국적 인상파 화풍의 오지호
오지호와 김주경이 함께 발간한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은 한국 미술사에 기록될 특별한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이 화집은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되었으며, 오늘의 기준으로도 매우 호화로운 도록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화집은 두 사람의 자비로 발간되었습니다. 이 화집에는 오지호와 김주경 각각의 작품이 10점씩 수록되어 있으며, 오지호의 글인 <순수회화론과>와 김주경의 글인 <미와 예술>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화집이 중요한 이유는 수록된 작품이 현재 거의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김주경의 작품은 전혀 전하지 않았으며, 오지호의 그림은 일부만 전달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도판들이 모두 원색이어서 원본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서 자료로서 더욱 중요합니다. 김주경의 초기 작품 경향은 서정적 사실주의에 가깝습니다. 그의 화법은 인상파 경향이며, 매우 밝은 색감을 사용하여 그의 감정적 성향을 보여줍니다. 1935년부터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화법을 따르면서 신선하고 밝은 색채와 빛의 미학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오지호의 작품은 김주경에 비해 더욱 인상파 화법에 가깝습니다. 그는 한국 특유의 맑은 공기와 청아한 자연미를 명랑하고 투명한 색채로 표현했습니다. 이 화집에 수록된 두 사람의 작품은 1930년대 유럽의 인상파 화법이 일본을 통해 어떻게 유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오지호는 도쿄미술대학에서 공부했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스승 후지시마 다케지가 구사했던 일본화된 인상과 화법보다는 오히려 조선 후기 전라도에서 일어난 남종화의 경향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허백련이 추구하는 미술세계와 오지호의 미술세계는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허백련은 한국적인 그림을 추구하기 위해 도쿄미술대학에서 일본의 신남화를 배우고 귀국하여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지호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후기에 이르면 명승이 아닌 한국 풍경과 주변 사물을 그렸는데, 이러한 소재들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격조로 표현했습니다. 오지호는 1974년 유럽 여행을 통해 그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본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매우 높은 수준을 자랑합니다. 특히 독일 함부르크의 항구 풍경이나 프랑스 파리의 거리 풍경을 그린 작품들은 오지호 특유의 인상파 화법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근대 서양화가들이 단순히 일본에서 인상파 화법을 수입했다면, 오지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내려 애썼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른 작가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아마도 '한국적인 풍경화'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지호의 작품은 그의 개성과 독창성을 반영하며, 한국적인 정서와 아름다움을 담아내었습니다. 특히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버터낸 그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일본 유학을 다녀왔지만 한국적이 것을을 담을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내는 연구와 끊임없이 제자 양성에 열정적인 그가 대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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