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계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길진섭의 삶은 그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이력뿐만 아니라 독특한 선택과 용기로 가득 찬 이야기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3·1 운동 참여로부터 민족정신을 받들어 예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교육을 받고, '목일회'를 조직하고 미술운동을 주도한 그는 한반도의 분단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탐색 사이에서 용감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에서 활동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인생과 작품을 되돌아보며 그가 남긴 이야기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미술의 시작하는 길진섭의 도전의 여정
길진섭은 아버지의 3·1 운동 참여로부터 민족정신을 배우고, 1921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에 대한 흥미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술을 더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고, 서울에서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후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가 예술적인 경로를 선택하게 된 계기를 보여줍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당시 한국에서 미술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울이 중요한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1923년부터는 김관호와 김찬영이 평양에 설립한 '삭성회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우면서 미술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 주력하여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두 전시회가 서양화가로서 입문하는 데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서화협회에 출품하고, 1925년, 1927년, 1928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길진섭은 한국 미술계에서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길진섭은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32년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했습니다. 서울의 익선동 한옥마을에 살았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구경 가는 그 한옥마을 한가운데에 그가 살았었습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중 길진섭은 다시 도쿄로 돌아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단체는 일본의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를 선생으로 두고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미술 사조를 가르치는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김환기와 김병기와 함께 공부하며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길진섭은 이곳에서 일본인 여학생 간노 유이코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가 문을 닫은 후에도 "백만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전위적인 미술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길진섭의 갑작스러운 귀국으로 인해 그들의 만남도 종료되게 됩니다.
길진섭의 민족정신과 미술활동
길진섭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목일회'를 조직하고 1930년대 미술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목일회'는 1934년 이종우, 장발, 구본용, 김용준 등과 함께 만든 양화 단체로, 그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목일회'의 이름 '일'자가 일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일본 당국의 의심을 받아들여 1937년부터는 '목시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후 김진심은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것을 꺼리고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민족정신과 '목일회' 사건에 대한 경험이 반일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반일의식은 향후 남북 분단 과정 중 사회주의를 택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길진섭은 1936년에는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 <모자>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1940년에는 서울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이 개인전에서는 평론가 윤희순이 《매일신보》에게 "현대적 표현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고 평가하여 길진섭의 작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길진섭은 일본 유학 시절에 시인 정지용, 도쿄미술학교 동문인 화가 김용준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1939년에는 이들과 함께 문예지 <문장>을 창간하여 디자인 편집위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인, 꽃, 풍경 등의 일상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작품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은 간결한 필치와 풍부한 감수성을 표현하였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간 길진섭
1946년에 서울대학교가 개교되고 미술학부가 설립되었을 때, 길진섭은 김용준 등과 함께 미술학부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당시 미술계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길진섭은 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조형예술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서울지부 위원장 및 중앙위원장 등의 역할을 맡으며 좌익 성향의 미술인들을 지도했습니다. 그의 좌익 성향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남한 미술계 대표로 몰래 북한으로 이동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정착하여 평양미술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고,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의 북쪽으로의 이동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것도 있지만, 동시에 본래 고향인 평양을 찾아가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1949년 12월에 신문에 실린 김만형의 글은 북한으로 넘어간 동료들에게 '자유를 찾아오라'라고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술계를 위해 군과 손잡을 대가는 무엇이던가? 오직 기만당했다는 분개뿐이다. 대한민국엔 철의 장막도 없고 속박도 없으며 모든 문화인들은 자유롭게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자유가 그립지 않은가. 북한 괴뢰집단의 모략과 기만을 군도 넉넉히 짐작했을 터인즉 군 자신의 진실로 돌아가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오라."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만형 역시 북한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일화는 예술가들 간의 개인적인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세상이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있음을 보여줍니다.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나 명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김만형과 길진섭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은 한국 미술계에 큰 손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정리하며 길진섭의 삶은 그의 예술적 업적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역동적인 역사와도 뒤얽힌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의 선택과 용기는 한국 미술계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는 그의 삶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과 업적은 한국 예술사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길진섭이 북쪽을 넘어간 것은 한국 미술계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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