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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한국 나전칠기의 혁신가 전성규

by 냠냠똥과자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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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인 거주 공간인 한옥이나 양옥집 안방에는 아파트가 보급되기 전까지 "자개농" 또는 "자개장"이라 불리는 특별한 가구가 일반적으로 있었습니다. 이 가구들은 처음 집을 마련할 때나 혼수품으로 준비되었고, 전통적인 나전칠기를 근대식으로 개량한 것으로, 안방의 기본적인 가구로서 가정의 안정과 안락을 상징했습니다. 이러한 자개농은 한국 근현대기의 안방을 지켜왔으며, 각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 한국의 시민들이 아파트로 거주하는 현대화 과정에서 서양식 가구로 대체되면서 자개농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약 100여 년 동안 한국인의 삶을 지탱하며 아름다움을 전했던 자개농은 이제는 구식의 유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자개농은 한국의 근대 나전칠기를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한 천제 공예가인 전성규(1880~1940)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한국 근대 나전칠기의 시조로써 이러한 가구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진성규의 나전칠기의 관심과 노력

전성규에 대한 기록은 그의 출신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서울 출신의 상궁의 양아들로, 궁궐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 궁중의 공예품을 어려서부터 접했다고 합니다. 전성규가 나전칠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39세 때입니다. 이때 그는 '고전적 조선색'을 가진 나전칠기를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큰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궁중에서 진상하는 나전칠기를 만드는 '삼청동 엄씨 공방'에 들어가 배우려 했으나, 그들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장 부근에서 노는 체하며 눈치껏 배우기도 하고 창문을 뚫고 보며 배우는 등 힘들게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한 해 만에 자개 껍질을 다듬고 깎고 오리고 박는 법과 칠하는 법을 모조리 배웠습니다. 전성규는 다른 장인들과는 다른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독보적인 능력 중 하나는 나전칠기 제작의 핵심인 '도안'을 다양하고 다채롭게 그려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의 도안은 다른 이들과는 수준이 다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산수문'이었습니다. 특히 금강산 풍경을 바탕으로 한 도안은 탁월했습니다. 이러한 도안 재주를 바탕으로 전성규는 다양하면서도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삼청동 엄씨 공방의 경영이 어려워질 때, 전성규는 빠르게 공장을 인수했습니다. 전통 장인들이 전성규를 멸시했던 것과 달리, 그는 이들을 포용하여 삼청동 작업장을 더욱 굳건히 다졌습니다. 특히 전성규는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나전칠기를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로 상품화하는 것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는 당시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개화된 근대인이 가질 수 있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는 호화로운 감상용 작품이 아니라 실용적인 가구의 대량 생산을 통해 국민들에게 나전칠기를 보급하고자 했습니다.

 

 

진성규와 나전칠기 혁신

1919년부터 전성규는 김봉룡, 송주안, 심부길 등 재능 있는 제자들을 모아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이들을 가르치며 수공업 수준을 넘어서 나전칠기의 대량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공장 경영을 계획했습니다. 통영에 대규모 공장을 짓기도 했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는 1920년에 김봉룡, 송주안 등 제자들과 함께 일본 도야마현 다마오카시에 있는 '조선나전사'에 들어가 조선식 나전 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새로운 기술과 사업 수완을 배웠습니다. 전성규는 일본의 '조선나전사'에서 새로운 환경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좋은 작업장과 과학적 기능이 추가된 새로운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시계 공장에서 사용하는 세공용 줄톱의 발견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도구를 통해 세밀한 작업이 가능해졌고, 나전무늬를 도안화하는 새로운 방법도 습득했습니다. 한국의 공방에서 사용되던 전통적인 도구는 세밀한 작업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속 세공용 줄톱은 전통적인 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도구의 발견과 나전무늬를 도안화하는 새로운 방법의 습득은 전성규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과 배움이 한국 나전칠기 공예를 한층 발전시킬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전성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작품은 디자인이 새로웠을 뿐만 아니라, 자개의 세공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기술에 창조적 상상력이 더해져 한층 빼어난 예술품이 탄생했습니다.

 

 

파리 만국미술공예박람회 성공과 후진 양성

1924년 겨울, 전성규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될 예정인 만국미술공예박람회에 출품할 기회를 얻게 되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전성규에게 출품을 권유하였고, 그는 이에 응해 제자 김봉룡과 함께 화병 한 점과 작은 서랍, 합 등 세 점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제작이 완료된 작품들을 도쿄에 있는 농상무성으로 직접 들고 출품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여 나전칠기 작품들은 파리에 출품되었고, 김봉룡의 작품은 은상을, 전성규의 작품은 '동상'을 수상하게 되어 한국인의 공예 작품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상을 받는 쾌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전성규와 김봉룡의 수상은 전적으로 전성규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출품을 따내고, 작품을 준비하고 제작한 것은 모두 전성규의 노력이었습니다. 작품을 제작한 장소도 전성규의 공방이었으며, 그는 두 작품 중 한 점은 김봉룡의 이름으로 출품하는 등 제자에게도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이는 전성규가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일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파리 만국공예미술박람회에서 상을 받은 전성규는 이후 작품 제작과 함께 나전칠기 기술의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1927년에는 장곡천정에 나전실업소를 설립하여 나전칠기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곳에서 나전칠기를 배우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3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나전실업소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전성규는 삼청동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에 다시 몰두했습니다. 그 이후로 전성규는 1934년과 193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여 나전칠기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그는 상을 받기 위해 출품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심사위원 자격을 갖췄으나 일본인들의 폐쇄적 운영으로 심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1937년에는 평안북도 태천군에 '태천칠공예소'가 설립되면서 전성규는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나전칠기의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했고, 개인적으로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훌륭한 칠공예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에 전성규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성규는 고려와 조선의 전통적인 방식을 받아들이며 나전칠기를 발전시킨 인물로서, 시계 공장에서 사용하는 서구식 실톱 등의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작업능률을 향상하고 전통기법을 개선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끝으로 전성규는 한국 나전칠기의 역사를 빛나게 하는 중요한 장인 중 하나입니다. 그의 노력과 열정은 전통적인 공예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한국 나전칠기는 전통과 혁신의 조화로써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기술과 현대적인 디자인이 조합되어 다채로운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복고 열풍으로 버려지는 자개장농이 다시 각광받고 있습니다. 옛날의 아름아움이 잊히지 않고 계속해서 생활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전성규의 노력 덕분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