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화단을 대표하는 3대 인물은 윤영기, 양기훈, 그리고 김규진으로 꼽힙니다. 윤영기는 흥선대원군 이하응 문하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미술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미술교육자였습니다. 양기훈은 서울의 장승업과 함께 청나라 미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미술세계를 일구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활약에 이어 서구 근대화 물결과 부딪혀 미술계의 거물이 된 김규진은 하나의 예술 통로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복합적 인물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 이름을 날렸을 뿐 아니라 미술 교육자로서 영향력이 컸고, 사진 기술 도입의 선구자로서도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근대적 의미의 화랑 발전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큰 글씨, 서화의 획 중의 획: 김규진
김규진은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숙부인 서화가 이희수에게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했습니다. 이희수는 평양의 유명한 서예가인 조광진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김규진도 은연중에 조광진 필법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스승 이희수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직감하며 새로운 미술세계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김규진은 청나라를 주유하며 유명한 중국 서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서화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8세 되던 1885년 중국으로 건너가 8년간 서화를 공부하였으며 북경, 양주, 상해 지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화풍을 배웠습니다. 또한, 상해에 망명해 있던 민영익과도 만나 서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습니다. 젊은 시절 중국에서의 경험은 김규진의 서화 수준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894년에 귀국하여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김규진은 대륙적 필치와 호방한 필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큰 글씨에 능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서화가가 되었습니다. 김규진의 큰 글씨는 주로 기관의 주문에 의해 쓰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절이나 부잣집의 현판으로 많은 주문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간에 그의 대범하고 활달한 필치가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전국의 절집에 걸려 있는 현판 중에 김규진의 글씨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금강산 구룡폭포 옆 바위에 새긴 '미륵불'입니다. 1918년에는 김규진이 금강산 바위에 '미륵불' 세 글자를 새겨 달라는 불교도들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특별한 큰 붓이 필요했고, '이왕가미술공장'에 특별한 큰 붓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키보다 더 큰 붓이 만들어졌고, 그는 20여 미터에 달하는 '미륵불' 세 글자를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성공적으로 벽면에 새겨졌으며, 한국 근대 석각 글씨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비록 자연을 일부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의 뛰어난 글씨로 인해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예술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김규진의 회화세계
김규진은 회화세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특히 대나무 그림(묵죽)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대나무 그림은 힘이 넘치면서도 유려하고 과감한 필력을 보이는데, 이는 그의 장점 중 하나입니다. 그는 얽매임 없이 화면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다양한 대나무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선시대의 다른 화가들이 주로 선비들의 취미 미술처럼 소심한 면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김규진의 수묵화는 활달한 필치를 바탕으로 예술가의 포효를 선보였으며 회화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굵은 대나무를 그린 '왕죽'은 청나라 화가들을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후배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김규진은 대나무 그림뿐만 아니라 산수화나 영모 등 다른 그림도 뛰어났습니다. 그의 말 그림이나 폭포 그림, 화조 등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1920년에 그린 창덕궁 희정당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과 <해금강총석정절경>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두 작품은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 전각을 재건할 때 김규진이 그린 것으로, 실제 금강산 풍경을 더욱 신비롭게 연출하여 마치 신령스러운 상상 속의 봉래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김규진의 창조력과 뛰어난 기술력을 잘 대변하는 명품 중 하나입니다.
서화의 지도자로서의 역할과 교육적 기여
김규진은 청나라에서 쌓은 서화 실력으로 압도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그의 서화 실력은 안중식, 김돈희와 어깨를 겨룰 만한 화가들로 인정받았으며, 뛰어난 지도력까지 갖추어 서화계의 지도적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며 한국 서화계의 중추를 이끄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김규진은 다양한 관직을 거쳐 영친왕에게 글씨를 가르치는 '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후에 서화가로서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였고, 총독부나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활약하여 많은 제약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1915년에는 미술 연구 단체인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는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으로서, 김규진이 서화에 대한 이론을 교과서로 삼아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김규진은 자신의 서화에 대한 이론을 책으로 펴내어 교과서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책 <김규진 화첩>은 영친왕의 스승 시절 서화교본으로 활용되었고, <서법진결>, <육체필론>, <해강난죽> 등은 서화연구회에서의 서화 교육을 위한 교재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근대기에 있어서 서화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초보자들에게 미술적 지식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국 사진과 화랑의 선구자
김규진은 사진 기술을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와, 서울 소공동에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는 등 사진술 도입과 화랑 경영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고종 임금의 초상 사진을 찍은 초상 사진작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이 사진은 미국의 재벌 에드워드 해리먼이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2015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노력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김규진은 천연당사진관을 경영하던 중에 한국 최초의 근대 상업화랑인 '고금서화관'을 설립했습니다. 고금서화관은 주로 자신의 작품을 주문받아 제작하고 판매하는데 주력했으며, 다른 명가들의 서화를 위탁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문 표구기술자를 고용하여 표구도 맡아 화랑의 역할을 넓혔습니다. 그는 미술품부터 비문, 상석, 현판, 간판 글씨까지 주문을 받아 다양한 문화예술을 수행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고금서화관을 운영했습니다. 이후 1920년에 천연당사진관을 폐업할 때 고금서화관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금서화관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의해 운영된 대표적인 미술관 중 하나였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김규진은 한국 미술사에 빛나는 별이며, 그의 예술적 업적은 한국 미술계의 발전과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대나무 그림과 사진 작품은 그의 창의력과 예술적 재능을 잘 대변하며, 그의 교육적인 역할은 많은 후배들에게 영감과 지식을 전달했습니다. 또한 그는 화랑 경영과 사진술 도입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 나가면서, 한국 미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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