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문화 해방구'인 서촌은 한국 근대 문화계에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활약한 곳이었습니다. 서촌은 명동과는 다르게 예술인들이 늘 모여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서촌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살았습니다. 소설가 김송과 그의 하숙인 시인 윤동주를 비롯하여 시인 노천명, 이상, 소설가 염상섭 등이 서촌에서 활약했습니다. 또한 동양화가로는 이상범과 이한복, 그리고 조각가 김복진과 이국전도 서촌에서 활동했습니다. 특히 서촌에서는 서양화가들이 많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유명한 삽화가인 이승만을 비롯하여 이제창, 공진형, 이종우, 김중현 등이 서촌에서 활동하며 서양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궁정동에는 정현웅과 이쾌대가 살며 이중섭도 한때 누상동에서 지냈습니다. 이들 예술가들은 서로 소통하고 지내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구본웅과 이상의 인연
서로 외형적으로는 다른 조건을 가졌지만, 그들은 문학과 미술이라는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이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상은 외모적으로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단정한 미남이었다. 반면에 구본웅은 선천적인 척추 장애로 인해 작은 키와 특이한 외모를 가졌다. 그러나 이런 특이성은 그들의 업적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한국 문학계를 놀라게 한 천재로 칭송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사조의 태동을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자랐고, 신명보통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구본웅은 4년 선배이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졸업 동기가 되었다. 그들의 집은 가까워서 자주 만났고, 이상은 구본웅의 새어머니 동생의 남편이자 이모부가 되었다. 이상이 폐결핵으로 돌아가자 변동림은 나중에 김환기와 재혼하고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꿨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구본웅과 이상의 우정은 그대로 이어져갔을 것으로 상상된다.
구본웅과 이상의 미술관심
구본웅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 제1 고등보통학교에 지원했으나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거절당하고 경신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그는 고려화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각에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 체력적인 이유로 조각을 포기하고 서양화로 전향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가와바타미술학교와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지만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경성고등공업 학교에 다니면서 유화 자화상을 그렸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한 작품은 전체가 노란 색조로 가득한 독특한 색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상은 '이상'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구본웅과 이상의 재미있는 이야기
구본웅과 이상의 함께 다니는 이야기는 당시 문화계에서 매우 유명했으며, 삼화가로 유명한 행인 이승만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간략한 소묘로 그렸습니다. 이승만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키가 큰 이상은 머리칼을 빗지 않고 제멋대로 날리는 것과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 망토를 두르고 하얀 백구두에 지팡이를 짚고 있어 우스꽝스럽게 보입니다. 반면 구본웅은 키가 작아 망토를 입고 있지만, 특이한 외모나 신체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서양 정장이 아닌 한복이나 인버네스를 즐겨 입었습니다. 이들의 키 차이를 이용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구본웅과 이상이 양백화와 함께 술집으로 향할 때 어린이들이 "곡마단이 왔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는 세 사람의 기괴한 행동으로 인해 동네 아이들이 그들을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승만이 전하는 것인데, 어느 날 구본웅, 이상, 그리고 박종화가 함께 술집에 가다가 이승만을 만났습니다. 박종화 역시 키가 작은 인물로 유명했는데, 키 큰 이상을 사이에 두고 구본웅과 박종화가 서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승만은 그들을 마치 뫼 산내자와 같다고 묘사했습니다.
구본웅과 이상의 인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구본웅이 이상의 얼굴을 그린 유화인 <우인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34년 경에 조선호텔 정문 건너편에 위치한 골동가게 '우고당'을 차리면서 이상이 늘 자주 찾아와 그런 이상을 모델로 그린 것입니다. <우인상>은 야수파 미술 사조의 기법을 잘 살려 대답한 색채와 걱정스러운 필치로 이상의 감성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야수파는 강렬한 색채와 과감한 붓질을 통해 감정의 해방을 추구하는 미술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인상>은 이런 기법을 통해 작가가 이상의 내면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구본웅의 유족들에 따르면, 이 작품에 "우인상"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구본웅과 친분이 있던 서양화가인 이마동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마동이 이상임을 알아보고 그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마무리하며, 구본웅과 이상은 서촌에서 자란 친구로서, 서로 다른 외모와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자랐고, 서로의 우정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구본웅은 미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이상은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들의 키 차이를 이용한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서로 다른 분야에서의 활약과 우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서촌은 이들 예술가들이 서로 소통하고 지내며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들의 업적과 이야기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며 서촌에서의 활동을 통해 한국 예술계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보여준 이들은 한국 현대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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