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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920년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화가 이종우

by 냠냠똥과자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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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고희동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등, 한국의 서양화단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그 이후 김관호와 김찬영도 도쿄미술학교로 유학하면서 한국의 서양화단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돌아와 서양화를 보급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성공적으로 작가로서의 길을 걷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한국의 근대 미술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에 이어 나혜석과 이종우가 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평가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유학한 뒤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평생 화가로 활동하며, 한국의 서양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20년대 파리에서의 이종우의 유학생활

이종우는 1925년에 다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프랑스 유학이었습니다.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짓말을 해가며 법률 대신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이종우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이 크고, 미술에 진심으로 열정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이후에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미술공부를 위해 유명한 학교인 '무슈 개랑 미술연구소'와 '무슈 슈 하이에프'에 다니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1927년에는 살롱 도톤에 <모부인상>과 <인형이 있는 정물>을 출품하여 입상하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특히 <모부인상>은 파리에서 함께 미술을 공부하던 친구의 부인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유럽 고전미술의 기법을 연구한 결과물로 평가받았습니다. 또한, <인형이 있는 정물>은 사물의 배치와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높은 격조와 기교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종우의 파리 생활은 풍족하고 순조로웠습니다. 집이 부유한 그는 집에서 넉넉할 정도로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파리에는 당시 27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이종우는 학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 부채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하숙집은 파리 유학생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그들은 주말마다 이곳에서 모여 고깃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당시의 한국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한 유학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종우의 귀국 후 작품과 활동

귀국 후, 3년간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1928년에 돌아온 이종우는 《동아일보》 주최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약 30여 점의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그중에는 살롱 <도톤느>에서 입선한 작품도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이때 출품된 <모부인상>은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가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이종우는 1929년에 다시 중앙고보의 미술 교사로 취임하여 교육에도 힘쓰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파리 시절과는 달리 필력이 쇠퇴하고 관찰력이 평온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중앙고보의 아뜰리에는 젊은 예비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고희동의 요청으로 설치된 이곳에서는 이종우가 지도하는 화실이 있었고, 이를 통해 젊은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화가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는 <청전 초상이>가 있는데, 이는 그가 이상범의 초상을 그린 것입니다. 이상범은 이종우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그들 간의 친분이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의 이종우

해방 후에는 한반도에서 좌우 대립이 심해지면서 이종우는 교사 생활 이외에는 다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새롭게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지만, 그 이외에는 주로 교육과 작품활동에 전념했습니다. 1950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이 창설되면서 이종우는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교육과 작품 활동이 크게 제약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종료된 후에는 제2회 국전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그 이후에도 국전 심사위원으로서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57년 제6회 국전에 출품한 〈아침〉입니다. 이 작품은 노년에 접어든 이종우의 깊은 해석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이른 아침 이슬이 내린 정원의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조선백자는 이종우의 담백한 심성을 나타내고, 난초와 푸른 풀들은 이종우의 화가로서의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구성, 색감, 필치 등에서 이종우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국전에 출품된 후에는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러나 2016년 한 경매에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나타나며, 그 후에 이종우의 도록에도 실려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종우는 한국 미술사에 큰 흔적을 남긴 화가로, 그의 작품은 그의 삶과 시대를 반영하며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그는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을 시작으로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한국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표현하며,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서를 담아내었습니다. 말년에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풍경을 그리며 자연에 깊은 감성을 녹여냈습니다. 이로써 그는 한국 미술사의 큰 산맥 중 하나를 이루는 인물로 기억되며, 그의 작품은 끊임없는 감성과 예술적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로써 이종우의 삶과 작품은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을 것입니다.